서로 짐을 지는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잘 아는 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짧게 근황을 묻고는 저와 친분이 있는 한 성도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그분은 남편을 먼저 천국 보내고 혼자 살아가는 미망인이었습니다. 현재 집은 어디에서 지내는지, 매월 수입은 어떻게 되는지, 살아가는 형편은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대답을 해드리고 묻는 이유를 여쭸습니다. 본인이 섬기는 교회의 맥추감사주일 헌금으로 어려운 형편의 성도를 돕기 위해 상황을 파악하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좀 의아하면서도 약간 충격이었습니다. 전화주신 목사님과 그 성도는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평소 왕래가 활발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미망인이 된 성도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그 목사님과 교회는 도울 길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깝지도 않은, 게다가 자기 교회 성도도 아니었지만 안타까운 소식을 그냥 흘려듣지 않고 도우려는 목사님과 교회에 적잖히 놀랐습니다. 결과는 잘 모르지만 만약 손길이 닿았다면 그 성도님께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을겁니다. 살다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던 질병의 화마가 불현듯 고통을 선사합니다. 믿고 의지하던 산 같은 가족이 갑자기 별세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기도 하지요. 순항하던 사업이 좌초해 온 가족이 환란의 떡을 삼켜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잘못된 만남 때문에 당한 사기로 재산을 잃고 망연자실하는 경우도 있고, 멀쩡하던 회사가 어려워져 월급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가장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던 고생의 물과 괴로움의 숨을 들이마셔야만 하는 경우가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곳이 교회이면 좋겠습니다. 그 때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곳이 교회이길 기도합니다. 교회가 고생의 날을 통과하는 분들의 피난처가 되길 바랍니다. 주님의 따뜻한 품이 눈을 감고 열심히 상상해야만 느낄 수 있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교회의 직접적인 손길을 통해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면 좋겠습니다. 기력이 없어 식사를 거르는 지체를 위해 죽 한그릇 끓이는 수고를, 가족을 먼저 보내고 슬퍼하는 지체에게 봉투 하나 내밀 수 있는 여유를, 무기력에 시달리며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자를 기어코 끌어내 밥 한끼 먹이고 커피 한 잔 하는 우리 교회이길 기도합니다. 누가 어려운지, 누가 슬픈지, 누가 원통한지 눈을 부릅뜨고 찾아 도울 의무가 교회에 있습니다. 인생의 무게로 넘어진 분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 짐을 집시다(갈 6:2). |